마법사는 소년기의 끝자락에 섰다. 이윽고 심장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파도가 차오른다. 하면 불티는 어디로 튀는가?         시간이 비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통 무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하릴없이 호그와트를 돌아다니며 필요의 방 따위를 찾거나,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공모하거나, 간식 하나를 두고 수다를 떨거나…. 손에서 퀘이플이 멀어진다. 손끝에 힘주어 밀어내면 천장으로 멀어졌다가, 손바닥 안으로 안착한다. 반복할 때마다 그물침대가 흔들렸다. 다시 던진다.       이제는 축구공보다 퀘이플이 익숙했다. 여전히 만년필을 선호했으나 깃펜도 쓸 줄 알게 됐다. 아서는 호그와트 입학장이 날아온 순간부터 마법사라고 말했으나 디미트리오스는 종종 이제서야 그 자격 갖춘 기분이 들었다. 그게 만족스러워서..

디미트리오스 파블라디스가 어떤 이미지를 구축하고 싶어하는지는 사실 꽤 명백하다. 조금 멍청하고 적당히 사랑스러우며 보기에 유쾌한 사람. 다행스럽게도 타고난 천성이 아주 그에서 빗겨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장난스러운 사고를 즐길 정도로 겁이 없었으나 제 안위를 챙겨 몸을 사렸고, 지혜를 갈음해 교활하기를 스스로 택했으며, 공정의 미덕보다는 한정된 편애를 선호했다. 이 소년이 배정될 수 있는 기숙사는 처음부터 슬리데린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작 그 자신은 비마법사 가정에서 자라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다이애건 앨리에 도착하자마자 올리밴더의 지팡이 가게로 신입생을 들여보낸 교수는 놋쇠 냄비를 구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가게는 비좁았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마법사 세계에선 ..

[범인]  외관 출처: 힝눈(CREPE@hingnun1)님 커미션 마법사는 소년기의 끝자락에 섰다. 이윽고 심장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파도가 차오른다. 하면 불티는 어디로 튀는가?       다시 설명할 필요 있을까? 곧잘 윙크를 행하곤 하는 파란 눈동자, 빼곡한 주근깨와 뚜렷한 이목구비. 지중해에서 태어났으나 결과는 동질적 생산물―다른 이들과 다를 것 없는 ‘보편적인 마법사’다.        물론 많은 친구들의 손을 거쳤다. 스칼렛을 따라 기르던 빨간 머리카락은 이제 가슴을 덮는다. 부스스해지지 않도록 묶고 다니는데, 숱이 적지는 않아 종종 머리끈이 끊어진다. 이본이 선물한 슬리데린 보석 목걸이는 셔츠 안쪽에서 달랑거린다. 그 위로는 세이지가 가르쳐준 대로 넥타이를 묶기 시작했고, 헤일리가 추천해준 크..

그토록 수다스럽던 사내가 조용하다. 침묵하는 얼굴이 자연스럽다. 그는 스스로 숨기려던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마녀는 이미 안다. 저것이야말로 뱀의 허물 벗은 민낯이다.       기실 대화에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하던 상대의 호의도 얻지 못했고, 이해는 실패했다. 그는 제 것을 마녀의 손에 들려주어서라도 거리를 좁히고자 했으나 이 관계는 가파르게 망가졌을 뿐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유쾌해지는 이 기분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악의를 그러모은 문장이 완성되고 나서야 옹송그렸던 등을 편다. 캔버스화의 닳은 밑바닥이 복도를 긁었다. 가자, 기숙사로. 말하지 않아도 그런 눈빛으로 지하를 턱짓한다.        "괜찮아.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잖아."       두 사람은 열넷에 불과하..

새빨간 머리카락이 바람을 헤집었다.그 이질적인 소년으로부터 시선을 떼는 일은 응당 어려웠다.         마빈 스트리트 21번지부터 24번지에 사는 파블라디스 가족은 자신들이 유쾌하다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기이하거나 신비스런 일들을 즐겼으며, 터무니없는 것을 사랑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민을 결정한 것은 그 때문이다.      편지가 날아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내용의 영문 편지다. 더럼 대학교의 전임교수직에 지원한 것은 소피아의 독단적이고 충동적인 결정이었는데, 바다를 건너 날아온 초청장을 보고서는 그조차도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우조가 담겨있던 유리잔이 찰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무 테이블 위를 굴렀다. 새빨간 곱슬머리의 여자는 술이 카펫을..

Swift 삽입곡과 동일       복도를 휘감는 바람이 차다. 아치형으로 구멍이 뚫린 복도가 정원의 한기를 그대로 들였다. 아직 말라붙지 않은 잡초가 무성하다. 바람이 붓질하는 대로 제 허리를 꺾었다가, 반대 방향으로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휩쓸리면서도 제자리에 박혀있다. 도무지 꼿꼿하거나 무결하다고는 부를 수 없는 형태다.       푸른 적의가 마녀의 속눈썹에 매달렸다. 날 선 감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는 없어도 피부로 감각할 수는 있다. 애초에 꽤 투명하지 않나, 삼 년 넘게 고수해온 애칭을 거부하고 성명을 넌지시 건네는 의도가. 남자의 이름은 애초에 영어로 발음되기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억양도 없고 강세도 없는 저 무딘 부름을 지칭어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기꺼이 수그리고 ..

디미트리오스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그는 단 한 번도 혈통 문제에 온전히 무관심해지지 못했다. 의식적인 회피는 몰두를 전제로 한다. 가정환경을 입에 올리지 않는 비마법사 출신의 마법사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오점을 잘 알았다.      그는 마법사 사회에 처음 입성하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 다이애건 앨리로 향할 때 동행했던 것은 호그와트에서 파견된 교수지, 제 가족이 아니었다. 뿌리가 도려내지는 기분이다. 교수의 손은 소피아의 것보다 한참이나 차가웠는데, 그럼에도 낯선 손을 덥석 잡아대는 것은 소년의 특기였고 놓는 일은 없었다. 장난감 가게로 고개가 돌아가는 와중에도 착실하게 교수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는 뜻이다. 새빨간 머리통의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보다는 이 동행인이 자신을 데려갈 새로운 세계에 정신..

디미트리오스 파블라디스 12 안녕, 리야.저번에 편지 하루 늦은 거 역시 봐주지 않을래. 약속은 격주마다잖아! 네 부엉이가 테살로니키까지 날아오느라 힘들었단 것도 알고, 너는 평소대로 기한에 알맞게 보냈다는 네 답장도 읽긴 했지만, 아무튼 난 하루 늦게 받았어. 수신자가 기준이어야지.나는 지금 막 더럼으로 돌아온 참이야. 그리스 여행은 나쁘지 않았어. 물론 좀 탔지만. 거긴 영국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해가 쨍쨍해. 학기가 시작하고 만나면 누군지 못 알아보는 게 아닌가 싶다. 생각해보니 그 전에 경기 보러 갈 때 보겠네. 이제 나도 그리스가 어떤 곳이느냔 물음에는 대충 답할 수 있는 그리스 출신-마법사가 됐다는 점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지. 그전까진 모양 빠지게 나도 모른단 소리밖에 못 했다고.지난..

디미트리오스 파블라디스 11나 지금 방금 집에 왔어!!! 소피아가 잔소리해서 곧장 학교 갈 짐 챙기는 중. 아직 학기 시작까지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어쨌든 너희 집에서 과제 미리 베껴두길 잘했다 싶어. 계속 움직이려니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거든! 다음 해부터는 너희 집에서 아예 같이 킹스크로스 역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지도. 어때? 나 싫증 나는 거 아니지? 너한테 듣긴 했지만, 집에 그렇게 동물이 많을 줄 몰랐어. 어거레이 실물을 보다니! 비가 쏟아져서 다행이지. (방금 좀 마법 생물 마니아 같았다. 너한테 옮아서 그래.) 마법 도구가 그렇게 많은 것도 신기했고. 난 냉장고에도 마법이 걸려있을 줄은 몰랐지. 교장 선생님이 기숙사 휴게실에도 마법사-최신식 냉장고 하나씩 장만해주시면 좋겠다. 어쩌..

[복종자]   외관 출처: https://picrew.me/ja/image_maker/1806920 전부 깎아내. 네 마음에 드는 부분만 남겨. 그렇게 물너울이 인다.        특징적인 외양은 모두 그대로다. 불에 타는 듯한 빨간색 머리카락, 부담스럽게 반짝이는 새파란 눈동자,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에 가득한 주근깨, 뚜렷한 이목구비와 특히 큼지막한 입…. 한데 이전과 같은 이질적인 분위기는 부재하고, 주변에 쉽게 스며든다는 느낌이다. 단순히 앳된 기운이 사그라졌기 때문인지, 우리가 그를 오래 본 탓인지는 알 수 없다.        3학년 내내 지저분하던 —그 모든 야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드디어 묶을 만한 길이가 되었다. 여전히 흘러나온 잔머리가 지저분하다. 열넷을 먹도록 단정이라는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