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

 

 

 

 

마법사는 소년기의 끝자락에 섰다. 이윽고 심장이 이끄는 곳으로 간다.

파도가 차오른다. 하면 불티는 어디로 튀는가?

 

 

 

      시간이 비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보통 무얼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났다. 하릴없이 호그와트를 돌아다니며 필요의 방 따위를 찾거나, 친구들과 함께 장난을 공모하거나, 간식 하나를 두고 수다를 떨거나…. 손에서 퀘이플이 멀어진다. 손끝에 힘주어 밀어내면 천장으로 멀어졌다가, 손바닥 안으로 안착한다. 반복할 때마다 그물침대가 흔들렸다. 다시 던진다.
      이제는 축구공보다 퀘이플이 익숙했다. 여전히 만년필을 선호했으나 깃펜도 쓸 줄 알게 됐다. 아서는 호그와트 입학장이 날아온 순간부터 마법사라고 말했으나 디미트리오스는 종종 이제서야 그 자격 갖춘 기분이 들었다. 그게 만족스러워서 사소한 것 몇 가지는 잃어도 대수롭지 않았다. 이를테면 파트라의 호의라든지. 남자는 근래 들어 제 마법 지팡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대신 중고 지팡이를 하나 구했다. 내년의 N.E.W.T.를 대비해서 지팡이를 아주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지팡이에 깊게 애착 붙일 것 없다. 그래 봐야 마법 도구일 뿐이다. 딴생각하는 동안 퀘이플이 얼굴 앞으로 가까워졌다.
      둔탁한 타격감이 머리를 울린다. 퀘이플이 미미의 코를 보기 좋게 뭉갰다.
 
      디미트리오스가 욕설을 지껄이며 해먹에서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땅바닥에 굴러다니던 리멤브럴을 잡아채면, 유리공이 미미의 뭉개진 코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었다. 뭘 잊어버렸다는 신호다. 건망증이 심한 마법사와 마녀를 위한 아이템! 이 마법 도구는 여자친구가 최근 정신을 쏙 빼놓고 사는 그에게 선물해준 것이었는데, 미미는 그 마케팅 캐치프레이즈가 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사들의 물품은 흔히 그 쓰임새가 그럴듯해 보이는 것에 반해 허술한 점이 꼭 한두 군데 있었다. 정작 뭘 잊어버렸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리멤브럴 따위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벽면은 몬트로즈 맥파이스의 몰이꾼 사인과 퍼들미어 유나이티드의 포스터들로 빼곡했고, 숫자 없는 시계는 걸려 있었으나 달력은 없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주말에 밀리랑 외로운 커피 가기로 했는데. 리멤브럴의 색이 돌아온다. 미미는 그제야 제가 까먹었던 것이 데이트 일정이란 걸 알았다.
 
      미미가 급하게 구두 뒤축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넥타이를 고쳐맸다. 움직이는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 내려가면 간신히 약속시각이다. 계단 입구에서 밀발의 마녀가 지하감옥 쪽을 힐끔대고 있었다. 디미트리오스가 밀리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냐, 방금 왔어. 게다가 원래 두 시에 보기로 한 거였잖아."
      밀리가 손목시계를 보란 듯이 들어 올리면, 바늘이 그제야 14시 1분을 향해 돌았다. 남자애가 과장스럽게 이마를 짚었다.
      "바쁘신 7학년께서 시간을 내주시는데 서 있게 하다니. 내 실책이야."
      장난스럽게 키득대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손등에 입술을 부딪치면 마녀가 마법사의 팔짱을 낀다. 어린 연인의 앞에서 수선스러운 호그와트의 분위기나, 호그스미드 곳곳에 배치된 오러들은 문제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동기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디미트리오스는 그럭저럭 애인 행세를 잘해냈다. 보편적인 데이트 코스를 밟아 프랭클린 박스보단 외로운 커피에 갔고, 단 걸 질색하면서도 딸기가 들어간 신메뉴라면 빼먹지 않고 시켰다. 캐서디를 구역질하게 하던 사랑시도 뻔뻔스러운 얼굴로 읊었고, 밀리가 그걸 옴니큘러로 찍겠다고 할 때엔 빼지 않고 곧장 재연했다. 퀴디치 경기에서 이기고 나면 곧장 노란 넥타이를 맨 마녀에게 달려갔고, 그 상대편이 후플푸프였을 때엔 웃는 얼굴로 몇 대 맞아줬다. 싸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항상 지는 쪽이었고, 이빨 달린 프리스비가 유치하단 소리엔 한동안 장난감 개조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 문제는 성의로는 다할 수 없는 감정에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간도 세상에 있던가?
      미미는 언제나 자신의 상상력을 과시했지만, 목적을 두고 하는 모든 만남이 그러듯이 도무지 밀리를 사랑하지는 못했다. 때때로 남자앤 그 자신이 여자친구보단 그의 수식어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구차한 변명은 있다. 밀리 홀랜드는 순수혈통 마녀였고, 그 옆에 있으면 지지부진한 혈통 논제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됐다….

      "딤, 봐."
      세 알파벳 짜리 짧은 애칭으로 밀리가 미미를 불렀다. 창밖으로 멀거니 향하던 시선이 잽싸게 돌아온다. "응?"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적어둔 깜찍한 애정 행각을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미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밀리가 쥔 깃펜와 냅킨 위로 떨어졌다. 외로운 커피의 뻣뻣한 냅킨 위를 기울여진 필기체가 물들였다. 가운데엔 디미트리오스 홀랜드라는 이름이 유려하게 적혀있다.
      "어때. 귀엽지?"

      농담이든 진담이든 성을 애인의 것으로 바꾸겠단 이야기는 몇 번 했었는데, 어쩐지 오늘은 미묘한 기분이다. 미미 파블라디스는 와중에도 속내를 숨기는 일엔 익숙했고 매끄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끝내주는데. 눈매가 휜다. 이거 설마 프러포즈야?
      아직 성년도 아니지 않느냐 구박하는 웃음소리가 이어진다. 미미는 차마 소리내어 따라 웃지 못했고, 이윽고 파란 눈알이 테이블 위를 더듬었다. 실토하자면 반짝거리지는 않는 시선이다. 선데이 푸딩의 단 향이 머리를 아뜩하게 했다. 원래도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수준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디미트리오스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몇 군데 깎여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내였으나, 파블라디스가 아닌 자신은 어쩐지 이상했다. 눈앞에 쉬운 길이 있는데도 이방인의 이름표를 떼는 것이 힘들다. 그때쯤 남자는 생각하고야 말았다.

      '이 방법은 버려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