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법사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돌아왔다. 디미트리오스는 발레리가 고향이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에 입안에 맴도는 노스탤지어를 이해했다. 남자의 염원은 늘 자기 자신 안으로 좁게 말려 들어가 성공 욕구로 발현되었으나, 발레리의 소망은 깊은 애정의 형태로 주변인에게 뻗었다. 오래 머문 자리에 뿌리내렸어도 이상하지 않다. 한편 미미는 좀처럼 고향이라는 단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으나, 거의 10년 만에 갖게 된 집을 두고서는 꽤 안락한 기분이 됐고. 해서 영국 사우스웨스트 잉글랜드의 고드릭 골짜기에는 눈에 띄게 부유하지도, 허름하지도 않은 마법사 가정 하나가 다시 들어섰다.
마법 사회는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2차 마법사 전쟁에서 불사조기사단은 승기를 거머쥐었으나, 그건 정말이지 위대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디미트리오스는 시작이 반이라는 관용어구를 믿기에는 은근히 현실적이었고 종종 냉소적이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쇠락했으나, 동트는 불빛을 시인하지 않으려는 이들은 많았다. 친-풀케 인사들이 줄줄이 위즌가모트 재판에 서고, 몇 번의 청문회가 이어지고, 법이 개정되는 동안에도 교전은 수두룩하게 이어졌다. 아이스크림 밴은 진작에 압수당했던 탓에 미미는 말 그대로 '발로 뛰어야' 했는데, 남자는 매일같이 무직 상태를 관두겠다고 씨근덕대거나 순간이동 면허를 따겠다는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자신의 멀린 1급 훈장을 자랑스러워했다. 초록색 휘장은 거실의 벽난로 옆 호두나무 선반에 놓였고, 그 옆의 꽃병에는 흰 제비꽃 생화가 매번 채워졌다.
꽃말이 따로 있는 것은 익히 알았으나 이 집에서만큼은 그게 행운을 상징했다. 덕분에 손재주라고는 최악을 달리는 사내도 마당에 화단을 마련했고, 큰 덩치를 구겨 앉아서는 흙을 파고 씨앗을 심었다. 온도는 마법으로 관리하더라도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보통 성가신 것이 아니라, 알도 없는 안경을 쓴 채로 서적을 들여다보는 일도 늘었다. 수확은 있다. 눈높이에 가득한 흰 제비꽃은 무구한 꼴을 하고 디미트리오스를 안심시켰다. 행운의 징표지 않나. 고작 열일곱 먹었을 적 졸업 파티 파트너에게 선물 받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건 영원히 행복한 결말 따위 있을 리 없다는 막연한 확신조차도 불식시키곤 했다. 평화라는 명칭이 마땅한 날들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두 번 보냈을 즈음에는 새로운 습관 몇 개가 자리 잡았다. 이를테면 주말마다 미트 파이를 굽는 것, 인연도 없는 초콜릿 전문점 안에서 서성이는 버릇, 발레리가 머리카락을 간질이다가 깨울 때까지 짐짓 자는 체를 하는 일…. 익숙한 목소리가 남자를 불렀다.
"웃는 거 봤어, 미미."
애칭을 불린 디미트리오스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기울어진 입꼬리 이불로 다 가리지 못한 채다.
"방금 깬 거야. 추워서 일어나기가 싫은데."
"음. 그럼 조금 더 잘래? 난 출근할 테니까…."
여자가 눈을 끔뻑거리고 답하면, 미미가 그를 품 안에 한 번 세게 끌어안았다가 상체 일으켰다. 안아달라는 뜻이었어. 사람 좋은 웃음 가장한 얼굴이 뻔뻔스럽다. 능청은 그가 태어난 이래로 가장 먼저 익힌 특기기도 했다. 사심 숨길 생각도 없이 내뱉으면 발레리가 멋쩍은 얼굴이 됐다. 그 얼굴 구경하는 기분이 달가워서 디미트리오스가 어깨를 으쓱이고 웃통을 챙겨입었다.
"아침은 아보카도 토스트 먹자."
"응. 난 좋아. 블루베리도 올릴까?"
"좋지. 이브한테 점심도 간단하게 먹자고 해."
디미트리오스가 토스터에 호밀빵을 집어넣으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접시 두 개와 식기, 냉장고에 있던 블루베리와 후숙한 아보카도가 각자 제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태연하게 요구하는 말에 발레리가 이유를 물었다.
"왜? 이유라도 있어?"
미미는 이제 으깬 아보카도를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만 꿀을 섞고 있었다.
"네 생일이잖아. 게다가 금요일이고. 둘이서 외식 겸 데이트나 하고 돌아오자고."
"그럴까? 재미있겠네…. 그럼 집으로 퇴근해? 아니면."
"내가 데리러 갈게. 아무리 사회복원사업팀이 바빠도 오늘은 정시퇴근하게 해주겠지."
마녀는 남자가 어쩐지 지나치게 확신한다고 생각했지만, 의아한 채로 되묻지는 않았다. 에블린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능률을 챙길 줄 아는 상사이자 동료였고, 수중의 업무를 보수적으로 고려하더라도 야근할 분량은 아니었다. 기밀을 제외하고서는 종종 수다 떨며 공유하니 짐작하는 바가 있나 보다. 더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토스터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그가 여자와 알고 지낸 것은 이제 스무 해로, 연락이 끊겼던 기간을 참작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이다. 미미는 이제 발레리 엘라 그레이스의 기질에 관해서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숱한 이상 징조를 보고서도 분명 별생각 하지도 않았을 테다. 이럴 때는 그의 눈치가 기민하지 않다는 사실이 고맙기까지 했다. 허식을 즐기는 것은 항상 남자 쪽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상대에게도 만족스러운 서프라이즈가 되었으면 했다. 디미트리오스는 열여섯 번째로 넥타이를 고쳐맨 뒤에야 돌아서서 선반 아래 숨겨둔 상자를 꺼내 챙겼다.
동반 순간이동을 핑계로 붙잡는 손이 좋아 아직도 면허를 따지 않은 거였지만, 가끔은 머글식 방법에도 낭만이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플루 네트워크로 런던까지 이동했고, 그 뒤엔 그레이스 자매의 블루브릭 빌더스 앞까지 느긋하게 걸었다. 계획은 오래전부터 세워두었고 점검도 이미 마친 뒤다. 조급해할 이유는 없었고, 상대에게 낭비하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았다. 비록 멋을 낸다고 고른 코트가 조금 얇아 손이 차게 식기는 했지만, 이건 곧 예약해둔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해결될 일이었다.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사내도 고백을 앞두고서는 조금 경직했다. 영영 곁에 있겠다거나 상대를 책임지게 해달라는 낯뜨거운 발언을 이미 일삼았는데도 그랬다.
따지자면 첫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 다만 디미트리오스 파블라디스는 들불과 같은 사내로, 그 숨 스스로 죽이고 엎드리기를 자처했을 때조차 원하는 것이 확실했다. 목표가 뚜렷하니 다른 모든 것들은 자연히 상대적으로 흐려졌다. 감정은 그를 가득 채웠으나 본질적으로 이루지는 못했다. 몸뚱이를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면 균형이 깨질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심해에 빠지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누리는 것만 즐기던 사내가 언제부터 연인 사이의 책무를 동경하게 되었지. 발레리 엘라 그레이스의 안위가 위험하다면 성공이 무의미하다 셈한 적은 또 몇 번이고. 남자는 이제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추스르지 못해 안달이다. 이제는 시인할 때도 되었다. 발레리는 그를 부끄럽게 만드는 유일한 인물 자처하곤 했다.
회사 정문에서 발레리가 걸어나왔다. 삐딱하게 기대어 앉은 디미트리오스를 보고서는 반가운 눈치다. 몇 시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달아 곧장 손을 잡아챘다. 깍지를 낀 채로도 두 사람의 손이 모두 차서, 미미가 냉큼 제 주머니 안쪽에 손을 밀어 넣었다. 오래 기다렸지. 나도 방금 왔어. 상투적인 인사에 기계적인 기교라고는 조금도 없다. 손이 차다는 핀잔에 남자가 말을 돌렸다.
"그냥 추위를 잘 타서 그런 거지. 나 네 생일에도 혼나야 해? 축하한단 말도 아직 안 했는데?"
"그러려던 건 아닌데…."
미미는 발레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 좋았다. 코를 찡그리고 웃으면 그제야 발레리가 조심스럽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둘은 쌓인 눈을 밟으며 걸었고, 도중에 가로등이 단번에 켜지는 런던의 거리를 보며 키득거렸다.
도착한 곳은 전망이 좋은 레스토랑으로, 분위기 자체는 한적했던 탓에 직원이 디미트리오스 파블라디스 이름을 읊었을 때엔 발레리가 남자를 쳐다봤다.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도 아닌데 예약까지 걸어둔 것이 수상쩍기는 했다. 미미야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의심을 무마하는 한편으로, 파블라디스 듣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리란 설레발을 쳤고.
복도를 따라 들어가 문을 열면, 붉은 장미 장식으로 가득한 방안에서도 꽃다발만은 희었다. 잘 세팅된 테이블 앞에서 디미트리오스가 무릎을 꿇었다.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워, 내가 널 사랑할 기회를 줘서."
계기라면 불분명하다. 사내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도 않았고 실제로 그런 일을 겪지도 않았으나 오래전 맞닥뜨린 은색 눈만큼은 기억했다. 예나 지금이나 반짝여서 계속 볼 수밖에 없는 색이다. 아무렴 프러포즈용 반지를 고를 때에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은색 다이아몬드 반지를 골랐다.
"이번에야말로 영영 곁에 있겠다고 했었지. 평생 책임지게 해달라고도 말했고."
다만 아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이 길었고 내내 즐거웠다는 사실이다. 이 상태 지속한다면 인생에 행복한 결말 존재한다는 말마저도 믿게 될 정도로.
기이하게도 두려움은 없다. 자만이 특기인 사내라지만, 지금은 거절당하지 않으리란 믿음 있다기보단 다른 선택지 없었단 사유다. 청혼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마음이라. 디미트리오스가 담백하게 물었다.
"결혼해줘, 내 사랑."
*고록이네요… 고록이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